리뷰 연극

[리뷰] 그때의 시, 그 안에 담긴 삶의 풍경. 연극 <기형도 플레이>

스토리 팩토리 2025. 4. 8.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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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인뉴스 김영식]

공연장 좌측에는 벽으로 세운 세트가, 우측에는 철제 구조물이 배치되어 있다. 무대 중앙에는 소파 형태의 의자가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열린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 무대는 각 공연마다 다른 형태로 구성되며, 각 단편에 어울리는 분위기와 공간감을 조성한다. 따뜻한 피아노 연주가 관객을 맞이하고, 등받이가 편안한 의자가 놓인 공연장은 아늑한 집중력을 유도한다.

연극 <기형도 플레이>는 '창작집단 독'의 작가 아홉 명이 기형도 시인의 시 아홉 편에서 얻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구성한 단편 희곡 모음이다. 1980년대에 쓰인 기형도의 시에 남겨진 현실의 감각과 시대적 좌절감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덤덤한 언어와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로 전하고 있다.

작품은 하루에 다섯 편씩, 격일로 에피소드를 나눠 공연된다. 기자가 관람한 날 무대에 오른 단편은 〈빈집〉, 〈기억할 만한 지나침〉, 〈위험한 가계·1969〉, 〈바람의 집〉, 〈조치원〉이었다. 이들 작품은 모두 기형도의 유일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에 수록된 시를 바탕으로 한다.

▲<바람의 집> 배우 차용학, 이경미. 사진제공 : 극단 맨씨어터



9편의 시에서 파생된 9개의 단편 연극

〈빈집〉 (유희경 작): 부부의 엇갈린 기억을 따라가는 이야기.
〈기억할 만한 지나침〉 (조정일 작): 비정규직 직원을 해고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린다.
〈위험한 가계·1969〉 (고재귀 작): 늦은 밤, 장례식장에서 죽은 아버지를 만나는 남자의 이야기.
〈바람의 집〉 (임상미 작): 아파트 재개발이 마지막 희망인 부부의 현실을 그린 작품.
〈조치원〉 (김태형 작): 서울역을 출발한 기차 안, 우연히 마주친 두 남자의 대화.
〈소리의 뼈〉 (조인숙 작):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게 된 대학생들의 불안과 혼란.
〈질투는 나의 힘〉 (천정완 작): 속수무책으로 늙어가는 작가 지망생의 초조함과 상실.
〈흔해빠진 독서〉 (박춘근 작): 책 한 권을 두고 다투는 자매가 숨기고 있던 진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김현우 작): 서점 사장과 아르바이트생이 마주한 기묘한 사건.

각 단편은 기형도의 시에서 모티브를 얻었지만, 시의 내용을 그대로 극화한 것은 아니다. 시는 출발점일 뿐, 작가들은 시의 언어와 정서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빈집〉은 반지와 과거 연인을 둘러싼 부부의 상반된 기억을, 〈기억할 만한 지나침〉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관계를 통해 권력과 무관심을 드러낸다. 〈위험한 가계·1969〉는 장례식장에서의 기이한 만남을 통해 가족과 기억을 다루고, 〈바람의 집〉은 재개발을 둘러싼 현실적 욕망과 부부의 균열을 비춘다. 마지막으로 〈조치원〉은 휴가 나온 군인과 중년 남자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삶의 고단함과 고립된 감정을 엿보게 한다.

▲<위험한 가계> - 이석준, 이동하(좌로부터) 사진제공 : 극단 맨씨어터




시가 남긴 이미지가 떠도는 무대 위

앞서 언급했듯, 각 에피소드는 기형도의 시를 단순히 극화한 것이 아니라, 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그 안에 담긴 이미지와 정서, 의미를 연극적 언어로 풀어낸다.

기형도의 시가 말하는 것은 흔적 없이 사라지는 죽음과 기억뿐만 아니라, 고독, 성장, 정체성의 혼란이다. 연극은 이러한 주제를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해낸다. 걱정, 긴장, 사랑, 사람 같은 구체적인 감정과 상황을 통해 시의 본질을 관객의 삶 속에 전하고 있다.

무대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여백의 순간이다. 배우가 대사를 통해 서사를 전달하는 시간 못지않게, 말 없는 적막의 순간들이 깊은 울림을 남긴다. 침묵 속에서 드러나는 표정, 몸짓, 조명과 음악은 오히려 한 편의 시처럼 여운과 정적의 미학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당신은 지금, 살아 있는가? 아니면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가?’

기형도의 시처럼, 이 연극은 어쩌면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를 조용히 질문하기도 한다.


▲<조치원> - 이석준, 이동하. 사진제공 : 극단 맨씨어터



자극적이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삶의 풍경

연극 〈기형도 플레이〉는 시처럼 자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삶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용히 그려낸다. 격정적이지 않지만 인생의 바닥을 경험한 이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며 살아야 할 이유를 묻는다.

그 다양한 삶의 조합들은, 우리 각자가 가진 외로움과 불안을 비추는 거울처럼 무대 위에 펼쳐진다.

공연은 극적인 조명이나 화려한 세트 없이 진행된다. 각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암전이 되고, 무대는 조용히 다음 이야기를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이 전환의 순간들은 마치 시집을 넘기는 듯한 리듬을 만들어내며 관객에게 새로운 기대감을 불어넣는다.

배우들은 여러 짧은 에피소드에 출연하며 각기 다른 인물과 감정을 선보인다. 한 명의 배우가 보여주는 상반된 얼굴과 감정은, 각 이야기의 무게를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데 실험적인 구성 안에서 배우들이 드러내는 섬세한 변화는 이 공연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이번 공연의 배우들 또한 특별하다.

초연 당시 이석준, 박호산, 우현주, 이동하, 이은, 김세영 등이 출연하여 각 작품의 개성을 살렸다면 이번 공연에서는 서정연, 조한철 등의 배우들이 합류하여 새로운 매력을 선보인다.

연극 〈기형도 플레이〉는 2025년 4월 3일부터 5월 4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공연된다.

시가 연극이 되고, 그 연극이 다시 우리의 삶을 비추는 이번 무대는 지금, 우리가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조용히 되묻고 있다.


김영식 within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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