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드인뉴스 김영식]
연극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은 리허설도, 감독도, 무대 위 연습도 없이 단 한 번 무대에 오르는 단 한 명의 배우가, 처음 마주하는 대본을 통해 관객과 함께 연극을 ‘완성’해 나가는 전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은 실험 연극이다.
전 세계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고, 연극과 영화계의 거장들과 함께 3,000회 넘게 무대에 오른 이 작품에는 케네스 브래너, 우조 아두바, 네이선 레인, 시니드 쿠삭 등 세계적인 배우들이 출연했다.
이번 한국 공연에는 박정자, 박상원, 남명렬, 송옥숙, 김경일, 이건명, 이석준, 박호산, 오용, 홍경민, 하도권, 박기영, 지현준, 김동완, 김다현, 최영준, 임강성, 이시언, 박혜나, 이엘, 김찬호, 김재욱, 정동화, 주민진, 최연우, 한지은, 박정원, 송유택, 강형석, 원태민, 최정우, 문유강, 김도연 등 총 33인의 배우들이 참여해 관객들에게 단 한 번뿐인 무대를 만들어간다.
이 연극은 매일 다른 배우가 무대에 서고, 단 한 번의 낭독으로 단 한 번뿐인 무대를 만든다. 한 배우가 두번은 없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며 관객에게 연극을 ‘체험’하게 만들고 있다.
규칙이 있는 연극 그리고 단 한번의 무대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은 이란 출신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Nassim Soleimanpour)가 자국의 검열과 출국 금지 조치를 피해 쓴 작품이다.
작가는 이란 정부의 통제로 인해 해외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대신해 이 대본이 세계 곳곳의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그는 자유를 제약당한 현실 속에서도 예술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했다. 당시 그는 검열과 감시의 대상이었고, 때로는 목숨의 위협마저 느끼고 있는 듯 하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완성된 이 대본은, 작가가 죽음의 공포와 맞서며 품은 감정과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감정은, 공연이 열리는 나라의 배우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바로 이 점이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을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일반적인 연극과는 다른 규칙이 있다.
작품의 규칙
1. 배우는 공연 당일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대본을 읽지 않는다.
2. 공연 중 처음으로 봉인된 대본을 열고, 관객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나간다.
3. 공연 중에는 외부와의 도움이나 소통 없이, 배우와 관객만이 무대 위에서 대본을 통해 작가와 대화한다.
4. 한 배우는 단 한 번만 출연할 수 있다.
이 무대는 반복되지 않는다. 오늘의 배우가 누구든, 오늘의 공연은 단 한 번뿐이다. 배우는 관객과 함께 즉석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관객 역시 단지 배우의 연기를 ‘보는 자’가 아닌 경험의 일부가 된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 작품은 작가가 대본으로 남긴 편지를 해석하고, 체험하고, 나누는 것에 가깝다. 관객과 배우는 함께 질문을 받고, 함께 침묵하고, 함께 웃고 함께 감정에 흔들린다. 그리고 결국엔, 작가가 던진 질문을 안고 극장 밖으로 퇴장하게 된다.
무엇보다 관객들은 이 작품의 시작점에 이란이라는 통제된 사회 속 작가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작가가 대본을 통해 멀리 한국까지 전하는 편지를 듣고 그의 생각을 이해해보자.
관객들 모두에게 공개된 무대
무대는 4면이 모두 개방된 구조로 되어 있다. 파란색 바닥 위에는 사다리 하나와, 작은 탁자 위에 놓인 투명한 두개의 물잔이 있다.
단 하나의 대본을 바탕으로, 각 배우의 해석에 따라 공연의 분위기와 길이가 달라지는 이 연극은 배우마다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열려 있는 공연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즉흥적인 해석을 제한하는 치밀한 지문으로 공연의 틀을 조율한다. 즉, 무대는 열려 있지만, 텍스트는 철저히 통제되어 있다.
리허설도, 연출도, 사전 정보도 없다. 프로듀서에게 대본을 받은 배우는 그제야 비로소 대본을 손에 쥐고, 무대에 서 있는 자신의 상황을 어리둥절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순간, 공연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안 알려주시더라고요."
이 연극은 어쩌면 배우에게는 극악의 환경이 주어지는 실험이자 도전이다. 이 공연에서 배우는 용감해야 한다. 동시에, 그 실험은 무대 위에서 배우의 용기와 반응을 통해 한 편의 진짜 연극이 된다. 이 무대는 배우의 숨소리와 말, 그리고 관객의 호흡, 웃음, 눈빛, 침묵이 작가의 의지가 더해져 완성된다.
처음 보는 대본을 읽는 낭독극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배우는 관객과 적극적으로 호흡하며 움직이고, 감정을 전달한다. 그래서 이 공연은 완성된 연극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관객은 배우를 통해 작가가 보내온 편지를 읽어내며, 어느 순간 메시지의 청취자이자 목격자가 된다.
암전 없이 배우가 대본을 받은 이후 시작되는 공연은 조명이나 음악도 없이 배우가 대사를 읽으면서 시작된다. 공연이 진행되는 그 고요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작가의 질문을 듣고, 마음속에서 조용히 응답하게 된다.
이란에서 온 편지 그리고 하얀 토끼와 빨간 토끼
이 작품은 관객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기승전결의 서사 구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관객은 때로 감정에 복받친 배우의 울컥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되고, 그런 즉흥성과 현장성에 더욱 몰입하며, 배우의 한 마디 한 마디, 대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렇게 관객은 배우를 매개로 하여, 작가로부터 직접 편지를 전달받는 듯한 감각을 경험한다. 작가는 대본 속에서 ‘하얀 토끼’와 ‘빨간 토끼’라는 상징을 통해, 체제에 순응하는 존재와 체제를 거스르는 존재를 대비시킨다. 그리고 그런 세계 속에서 인간은 선택을 강요받으며,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갈린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작가는 단 한 번의 암전으로 관객에게 죽음을 직접 목격하게 한다. 그 순간은 관객 각자의 감정과 해석에 따라 질문 혹은 대답으로 남게될 것이다.
연극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은 검열을 받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작가의 작품으로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은유와 표현을 통해 깊숙한 의미를 전달하는 작품이다. 그러기에 표현하는 배우에 따라서는 다른 의미를 받고 퇴장하는 관객도 있을 듯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작가의 창작에 대한 열망과 작가의 죽음을 은유하는 다양한 의미는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하는 의미와 선언이 되지 않을까 싶다.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은 검열 아래 놓인 국가에서 살아가는 작가가 만든 작품인 만큼, 직접적인 정치적 언어 대신 은유와 상징을 통해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같은 대본을 읽는 배우의 목소리 안에서, 각기 다른 답변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작품에 담긴 죽음의 은유와, 죽음을 넘어 창작을 향한 작가의 열망은 연극이라는 형식을 빌린 절박한 외침이 아닐까 한다.
공연 이후 진행되는 배우와 관객들의 느낀 소감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있다. 이를 통해 관객들이 배우들의 작은 소감을 들을 수 있고 여운을 나누며 이 작품 속에 더 들어갈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김영식 withinnews@gmail.com
'리뷰 연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뷰] 죽음 너머, 인간의 존엄을 말하다. 연극 <유령> (0) | 2025.06.05 |
---|---|
[리뷰] 연극의 맛을 전하는 작품. 연극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 (0) | 2025.04.15 |
[리뷰] 그때의 시, 그 안에 담긴 삶의 풍경. 연극 <기형도 플레이> (1) | 2025.04.08 |
[리뷰] 사회적 위선과 인간 본성에 던지는 질문. 연극 <지킬앤하이드> (0) | 2025.03.25 |
[리뷰] 쉽지 않은 시작 그리고 미소. 연극 <비기닝> (0) | 2025.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