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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리뷰] 멈춰 있던 시간을 움직이게 한 온기.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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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인뉴스 김영식]

하얗게 얼어붙은 국경 도시, 그곳에 세 명의 청춘이 있다.

우연한 만남과 낯선 감정의 충돌 속에서, 얼어붙었던 마음의 한 자락이 서서히 녹아내린다. 안소니 첸 감독의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는 주저하는 사이 어른이 되어버린 나나(주동우), 하오펑(류호연), 샤오(굴초소)의 멈춰 있던 청춘의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따뜻한 균열의 순간을 포착한다.

중국과 싱가포르가 공동 제작한 이 작품은 제76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특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정말 인상 깊고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평하며 영화가 지닌 정서적 밀도를 높이 평가했다.

<브레이킹 아이스>는 서로 다른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세 인물이 마음을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정서적 파동을 따라가는 청춘 로드 무비이자, 얼어붙은 감정이 조심스레 풀려가는 과정을 담은 서정적 성장 서사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



서로 다른 결핍을 가진 세 사람

중국 조선족 자치구 연변에서 관광가이드로 일하는 나나,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연변을 찾은 하오펑, 그리고 낡은 트럭과 오토바이를 몰며 식당에서 일하는 나나의 친구 샤오. 세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인물들이지만 모두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채 하루 하루 견디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우연한 계기로 만났음에도 이들은 친구처럼 함께 어울린다. 하나의 오토바이에 셋이 올라타고, 술을 마시고, 밤거리를 걷는다. 서점에 들렀다가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젊은 청춘들이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들이 조용히 흐른다.

하지만 이들의 행보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영화 <비포 선라이즈>와 같이 로맨틱하게 흐르기보다 영화적 꾸밈없이 이 청년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며 관객들과 함께 한다.

하지만 이들의 여정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나 <비포 선라이즈>처럼 로맨틱한 서사로 흘러가지 않는다. 영화는 이 청년들의 현실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담는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얼어붙은 서로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브레이킹 아이스>는 중국과 북한의 국경이 맞닿은 조선족 자치구 연변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 속 결혼식 장면에서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길거리 곳곳에는 한글 간판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풍경은 인물들이 품고 있는 정체성과 거리감, 이방인의 감정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좋은 배우들이 만들어낸 청춘의 우울함

연변이라는 지역성과 배경이 해외 관객들에게는 더 깊은 감정적 울림을 전달하는 요소가 될 수 있지만 국내 관객에게는 선입견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러한 지역적 거리감과 정서적 생경함을 메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세 배우의 진심 어린 연기다.

주동우, 류호연, 굴초소. 세 배우의 내밀하고 절제된 연기는 감정의 진폭을 키우기보다, 조용히 스며드는 방식으로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소년시절의 너> 등을 통해 이미 여러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주동우는, 혼란스러운 청년기를 보내는 나나의 내면을 섬세하고도 투명하게 그려낸다. 청순한 이미지에 감정을 견디는 깊이를 얹은 그녀의 연기는 이번 작품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류호연은 도시의 일상에 잠식되어 자신을 잃어가는 하오펑 역을 맡아, 청춘의 공허함과 내면의 침잠을 절제된 연기로 풀어냈다. 무언가를 견디는 듯한 눈빛과 말 없는 장면 속에서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국내에도 많은 팬이 있는 샤오 역의 굴초소는 날 것 그대로의 청춘을 드러내는 감정의 미세한 변화를 표현하는 능력을 통해 자신이 캐릭터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류호연은 도시의 일상에 잠식되어 자신을 잃어가는 하오펑 역을 맡아, 청춘의 공허함과 내면의 침잠을 절제된 연기로 풀어냈다.

굴초소는 샤오라는 인물을 통해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낸다. 유쾌함, 무기력, 다정함이 뒤섞인 그의 눈빛은, 인물이 가진 상처와 방황을 대변한다. 또한, 감정의 미세한 진폭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며 캐릭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드러낸다.

세 배우의 감정은 때로는 교차하고, 때로는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흐름은 관객의 마음 한가운데로 스며든다.



얼어붙은 감정과 다시 일어서는 용기

<브레이킹 아이스>는 극적인 사건이나 드라마틱한 전개보다는 각 인물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 후반부, 이들은 백두산 천지를 가자고 의기투합하는데 이들 앞에 놓여진 백두산은 눈이 무릎 위에 올라와 있고 눈보라와 거친 바람은 이들의 입산을 막고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더 이상 산에 오르기를 멈추라고 말한다.

영화의 후반부, 세 인물은 함께 백두산 천지를 오르기로 결심한다. 그들 앞에 펼쳐진 눈 덮인 산길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험난하다. 눈은 무릎 위까지 쌓여 있고, 세찬 눈보라와 바람은 이들의 발걸음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마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말라는 듯한 자연의 경고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그 순간, 이들은 후퇴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닌 각자의 방식으로 다시 삶을 살아가려는 결단을 보여준다.

안소니 첸 감독은 이 영화를 “청년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라고 소개했다. 젊다고 해서 삶에 고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청춘의 순간은 가장 불안하고 가장 약한 시기이기에, <브레이킹 아이스>는 그 불안 앞에서 멈춰 선 이들에게 다시 한 걸음을 내딛을 용기를 건넨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비싼 시계를 차고, 좋은 직장을 다닌다 해도, 삶을 살아가는 불안 앞에서는 누구나 무너질 수 있다고 말한다. 꿈을 잃고 현실과 타협하는 시간이 있더라도 그 시절 간절히 바랐던 마음만은 잊지 말자고 말하기도 한다.

영화는 냉담한 현실의 온도를 그려내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는 작은 온기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또한 작품이 담은 그 현실적인 분위기야말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진짜 온도가 아닐까 싶다.

<브레이킹 아이스>는 세 인물을 통해 동시대 청춘이 느끼는 공허함, 불안, 그리고 작지만 분명한 희망을 담아낸다. 그것은 빠르게 소비되는 청춘의 이야기가 아닌, 다소 느리지만 3명의 감정이 진하게 남고 있고 영화 속 냉담한 현실 속에 얼어붙은 마음이 있는 이들과 영화 밖 청춘들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내미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는 6월 4일 개봉한다.


김영식 within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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