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드인뉴스 김영식]
비행기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 그리고 긴박한 음악.
웨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페니키안 스킴>(The Phoenician Scheme)은 이렇게 한 장면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거물 사업가 자자 코다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암살 위협을 받고 있다. 여섯 번의 비행기 추락 사고, 셀 수 없이 많았던 암살 시도에도 살아남은 그는, 이번에도 죽음을 피한 채 수녀가 된 딸 리즐과 함께 거대한 인프라 프로젝트를 완수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그의 죽음은 누군가에게는 비극이고, 누군가에게는 기회다.
22일 언론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페니키안 스킴>은 웨스 앤더슨 특유의 스타일을 또 한 번 고스란히 담아낸다. 영화는 관객을 '웨스 앤더슨의 세계'로 초대하며, 그만의 미학을 보여준다.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이 유지된 작품
한국에서도 그의 스타일은 하나의 전시 주제로 다뤄질 만큼, 앤더슨의 미장센은 독창성과 완결성을 동시에 지닌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널리 알려진 그의 영화 색감은 이번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파스텔 톤과 강렬한 대조, 정확하게 계산된 대칭 구도, 정교한 세트 디자인은 여전히 눈을 사로잡는다.
일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보여준 독특한 색감을 보여줌과 동시에 영화는 웨스 앤더슨의 시그니처 스타일이 유지한다. 특유의 대칭적인 구도, 파스텔 톤의 색감, 세트 디자인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앵글을 통해 보여주는 다양한 도형적 모형은 시대적인 낭만을 짙게 만든다.
그럼에도 웃음을 놓치지 않는다. 화면 안에 홀로 서 있는 한명 있다면 누군가가 스윽 다가가 두명의 대칭을 만들기도 한다.
음악적 선택 역시 흥미롭다. 전작들과 달리 이번에는 빈티지 팝보다는 클래식 음악이 주를 이루며,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더욱 절제된 방식으로 끌어올리는 선택을 하고 있다.
웨스 앤더슨이 보여주는 가족의 화해
웨스 앤더슨의 모든 영화에서 등장하는 가족 간의 갈등과 재결합, 혹은 치유가 이번 작품에도 중심 서사로 작동한다.
<패니키안 스킴>에도 '가족'과 '화해'가 놓여 있다.
주인공 자자 코다에게는 세 명의 부인을 통해 얻은 아홉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다. 그중 외동딸 리즐은 어린 시절 수녀원으로 보내져, 아버지와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왔다. 암살 위협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자는 다시 만난 딸과 함께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를 공유하며 관계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앤더슨은 이 재결합의 과정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갈등과 화해를 이끄는 뚜렷한 기승전결 대신, 인물들은 서로를 마주한 채 각자의 세계 안에서 조용히 머문다.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기이하게 느껴지는 그들의 태도는, 오히려 감정의 진심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낸다.
앤더슨은 끝내 감상적인 결말을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은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사실에서 어떤 쾌감과 위로를 얻게 된다. 그것이 앤더슨식 서사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페니키안 스킴>은 감독의 고집스러울 만큼 일관된 미학 안에서, 아주 미세한 진화 혹은 변주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누군가에게는 반복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웨스 앤더슨의 방식이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화의 첫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페니키안 스킴>은 여전히 ‘웨스 앤더슨적’이라는 점이다.
웨스 앤더슨의 팬들이라면
<페니키안 스킴>은 거친 상황 속에도 유머를 잃지 않고, 코미디 속에서도 무게를 잃지 않는다. 그 미묘한 균형감은 웨스 앤더슨 감독의 대표적인 미덕이자, 그를 사랑하는 팬들이 기대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에는 베니시오 델 토로가 주연 자자 코다 역을 맡았으며, 그의 중심을 받쳐주는 조연 배우들의 면면도 눈에 띈다. 농구를 하는 톰 행크스, 수염을 붙이고 맨손 격투를 벌이는 베네딕트 컴버배치, 그리고 스칼렛 요한슨, 리즈 아메드, 제프리 라이트, 마이클 세라까지. 각자 짧고 기묘한 배역으로 등장해 “여기 이렇게 나올 줄이야” 하는 반가움과 놀라움을 동시에 선사한다.
극 중 자자 코다는 어려운 협상을 타결하기 위해 직접 농구를 하기도 하고, 다른 인물이 쏜 총에 맞기도 한다. 사건의 긴장감 속에서도 피식 터지는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은, 앤더슨 특유의 ‘무심한 개그’가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
소동과 소리가 함께 있고, 영화가 주는 잔상이 영상과 관객들의 기억에 남는다.
영화에는 소동극 리듬과 순간적인 침묵이 공존하며, 소리와 정적이 묘한 긴장과 여운을 만들어낸다. 때로는 설명 없이 사건이 흘러가고, 문맥은 생략되지만, 오히려 그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더 많은 상상을 하게 만든다. 가끔 삽입되는 점프컷과 정지된 미장센은 웃음을 자아내는 동시에 앤더슨의 독보적인 미술 감각을 각인시킨다.
결국, <페니키안 스킴>은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익숙하고 반가운 요소들로 가득하다. 동시에, 그의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런 영화도 있구나’ 하는 신선한 충격이 될지도 모른다. 그가 구축해온 세계는 여전히 건재하며, 조금씩 다른 색채로 변주되고 있다.
영화 <페니키안 스킴>은 5월 28일 개봉한다.
김영식 within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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