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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뮤지컬

[리뷰] 그리운 시절로 돌아갈 방법은? 창작가무극 '천 개의 파랑'

[위드인뉴스 김예림]

열심히 스펙을 쌓아 취직을 하고, 열심히 자금을 모아 집을 사야하는, 하늘 한 번 올려다볼 여유가 없는 게 현실이다. 잠시 숨 한 번 쉬고 싶다면 뮤지컬 <천 개의 파랑>으로 한 숨 돌려보는 건 어떨까.

과학문학상을 수상한 베스트 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천 개의 파랑>은 가장 차가워 보이는 소재로 가장 따스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많은 관객들의 인생작품이 되리라 확신한다.

막이 오르고 반가운 모습이 보인다. 아는 사람은 아니고, 아는 로봇이다. 방금 전까지 로비에 돌아다니던 안내 로봇을 무대 위에서 다시 마주하자 은근히 반갑다. <천 개의 파랑>에는 다르파 로봇을 비롯해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쉴새 없이 등장한다.

진짜 로봇들은 물론, 휴머노이드 뒤에는 블랙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이고, 로봇탈을 쓰고 움직이기도 한다. SF 로봇 소재라면, 아무리 AI 기술이 발전해 익숙해졌다 해도 무대 위에서 다소 멀고 낯설게 느껴질 법하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천 개의 파랑>은 어색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현실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게 바로 <천 개의 파랑>의 매력이다.

<천 개의 파랑>속 근 미래는 말이 더 빨라지고 기수도 죽지 않아 경마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소방관은 현장에 가기 전 생존수치를 예측할 수 있고, 은행에서는 개인의 성향과 상황을 고려해 보험금을 어떻게 활용할지 추천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보니 로봇연구 이야기인가 싶지만, <천 개의 파랑>은 빠른 레이스를 펼쳐야하는 세상에서 천천히 행복을 느끼며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2025 <천 개의 파랑>. 사진제공 : 서울예술단




천 개의 단어를 배우게 된 로봇이 바라본 하늘

로봇 수리에 관심이 많은 연재, 휠체어를 탄 언니 은혜, 과거 3%의 생존 확률로 살아남은 엄마 보경까지 세 모녀는 2035년을 살아가고 있다. 2035년 한국은 휴머노이드 기수 로봇이 등장하며 경마가 인기를 끌고있다.

경주마 투데이와 호흡을 맞추는 휴머노이드 기수 C-27은 우연히 천개의 단어를 알게 되고, 이를 통해 투데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C-27은 투데이를 멈추기 위해 경기 중 스스로 낙마하며 폐기 위기에 처한다. 연재의 눈에 폐기 직전의 C-27이 들어오고, 콜리라는 이름을 붙인 뒤 수리를 시작한다. 한편, 투데이는 안락사를 앞두게 되고 은혜는 투데이를 지키기 위해 나선다.

콜리는 투데이와 호흡한다. 사실상 숨을 쉬는 것은 아니지만 둘은 팀처럼 움직인다. 콜리는 호흡할 순 없지만 옆 사람이 행복하면 함께 행복을 느낀다. 불행에 대해선 이렇게 말한다. ‘불행한건 못 느껴요. 제가 느끼려하지 않으니까요. 불행을 느끼려 노력하지 말아요.’ 이런 콜리에게 투데이의 행복이 멈춘 것은 엄청난 일이었으리라. 결국 콜리는 투데이를 위해 중심을 뒤로한 채 하늘을 바라본다.

▲2025 <천 개의 파랑>. 사진제공 : 서울예술단



콜리가 알고 있는 천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찬란하다’ 콜리가 처음 내뱉던 그 단어처럼 작품은 마치 찬란하게 번져가는 파랑 같다. 그 푸르른 찬란함에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다. 천개로 단어로 이뤄진 세상을 맞이한 콜리는 살아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폐기를 앞두고도 하늘이 저렇게 빛나는데 어떻게 바라보지 않을 수 있겠냐며 마굿간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던 콜리. 이런 콜리의 모습들이 윤태호 배우의 순수한 말투와 청량한 목소리와 어우러져 내내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우승확률 0.01% 세상에서 제일 느린 경마 연습. 우리의 목표는 시속 30킬로예요.

투데이의 수명을 2주 연장하기 위해 아이들은 다시금 경주를 계획한다. 마지막 경기의 목표는 시속 30킬로.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 느린 경마 연습이 시작된다. 우승 확률 0.01%의 경주마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손가락질 한다.

하지만 콜리와 투데이는 신경 쓰지 않는다. ‘천천히, 달리지 않는 연습이 필요해. 모든 걸 다 듣고 살 필요 없어. 자신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달리면 돼.’ 이들은 잊지 않고 자신의 속도대로 나아간다.

▲2025 <천 개의 파랑>. 사진제공 : 서울예술단




'멈춰있던 시간은 또 흐를 테니 슬픔에 고여 있지 말아요. 행복이 고통도 이길테니까.'

작품은 콜리와 연재의 이야기는 물론, 은혜와 보경의 사정을 그리며 다양한 사회적 문제와 연대를 담고 있다. 휠체어를 타는 은혜는 남들처럼 온전한 두 다리를 갖고 싶은 게 아닌 사실 진짜로 갖고 싶은 건, 원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였음을.

딸에 대한 죄책감과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지닌 보경에게 필요한건 솔직한 대화와 오늘의 행복이었음을. 힘든 티를 내지 않고 묵묵히 버텨내던 세 모녀 곁에 콜리가 등장하면서 천 개의 파랑이 천 개의 행복이 되어 번져나간다.

콜리는 ‘그리운 시절로 돌아갈 방법은 현재 행복을 느끼는 것’이라며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보경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천천히 시간이 흐르게 될 거예요. 천천히 움직여 봐요. 멈춘 상태에서 움직이려면 순간적으로 큰 힘이 드니까요.’

▲2025 <천 개의 파랑>. 사진제공 : 서울예술단




'행복만이 유일하게 과거를 이길 수 있어. 행복만이 모든 걸 이겨'

투데이가 대답할 수 있다면 묻고 싶다는 기자의 질문을 끝으로 막이 내린다. ‘투데이 행복한가요?’ 이 문장처럼 당신에게 질문해본다. ‘오늘 당신의 하루는 행복한가요?’

투데이, 하루하루 행복이 쌓여가 모든 것을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이름이 아니었을까. 당신에게도 행복이 차곡히 쌓여가길 그래서 모든 고통과 슬픔, 그리움을 이겨낼 수 있길 바란다.

<천 개의 파랑>은 뛰어난 작품성과 실력 있는 배우들이 만들어낸 완벽한 무대로 많은 관객들의 사랑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공연 기간이 짧아 아쉽지만 앞으로 오래도록 길게 만날 수 있길 희망한다.

한편, <천 개의 파랑> 프로그램북은 QR코드로 다운받아 읽을 수 있고, 서울예술단 배우들의 프로필카드도 배치되어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참고하시길 바란다.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천 개의 파랑>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오는 3월 7일까지 공연된다.​


김예림 withinnews@gmail.com